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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네! 알렐루야! 수사님 & 형제님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교황님의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을 올립니다.  ※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직역, 의역, 오역이 제~법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라며... (피드백 열렬히 환영합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바티칸 대성당 성토요일, 2022년 4월 16일      많은 작가들이 별들이 빛나는 밤의 아름다움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밤은 죽음을 예고하는 빛의 흐름에 분열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밤에 우리는 복음의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 일어나시는 하느님 생명의 새벽의 첫 빛을 볼 수 있도록 합시다.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빛이 조용히 오기 전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그리고 눈부신 의복을 입은 두 인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루카 24,1-10 참조). 그들은 보았고, 들었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세 동사와 함께 우리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주님의 파스카로 들어갑니다.      여인들은 보았습니다. 부활의 첫 선포는 진술을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묵상을 해야 하는 표징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평화로워야 할 무덤 근처 묘지에서 여인들은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 나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주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2-3절). 부활절은 우리의 기대를 뒤집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놀랍고 놀랍게 하는 희망의 선물로 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선물을 환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때로 -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 이 희망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지를 못합니다. 복음에서의 여인들처럼 우리도 질문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고, 예상치 못한 징조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5절).      우리 모두는 너무 자주 눈을 아래로 향하여 생명과 현실을 봅니다; 우리는 지나가는 이 날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미래에 환멸을 느끼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만 걱정을 하고, 무관심의 감옥에 정착하여,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불평만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체념과 숙명의 무덤 앞에 멈춰 서서, 생명의 기쁨을 묻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주님은 두려움, 고통, 그리고 죽음이 우리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있는 다른 눈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 덕분에 우리는 무에서 생명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칼 라너). 그 생명은 이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완전하고 영원히 포용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죽음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위로 향하고, 슬픔과 쓰라림의 베일을 우리 눈으로부터 제거하고, 하느님이 가져오신 희망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여인들은 들었습니다. 그들이 빈 무덤을 보고, 눈부신 의복을 입은 두 인물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5-6절). 우리는 이 단어들을 잘 듣고 반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범주 안에서 하느님을 꿰뚫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반복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우리가 어려울 때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그분을 찾고, 우리의 나머지 일상 생활과 결정에서 그분을 제쳐두고, 그를 잊어버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반복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말과 습관적인 사고 방식과 행동으로 가둘 수 있다고 생각 할 때마다, 사람들이 울고, 투쟁하고, 고통 받고 희망하는 삶의 어두운 구석에서 그분을 찾는 것을 소홀히 할 때마다, 우리는 반복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우리도 여인들에게 하신 질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우리가 계속 죽음에 있으면, 부활절을 축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포로로 남아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용서받을 용기가 부족하다면; 우리가 변화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악의 일을 깨고 예수님과 그의 사랑을 위해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길 바라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대신에,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을 부적으로 축소하고, 하느님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든다면 말입니다. 과거의 폐허 속에서 주님을 찾고, 습관의 무덤에 그분을 가두는 기독교는 부활이 없는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무덤 한 가운데에서 머물지 말고, 살아나신 그분을 찾으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의 얼굴에서, 희망하는 자들과 꿈꾸는 자들의 역사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그분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드디어 여인들이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선포했습니까? 부활의 기쁨. 부활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악과 죽음을 이겨내신 하느님의 놀라운 선언에 대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부활의 빛은 여인들을 기쁨의 황홀경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무덤에서 발길을 돌려” (9절) 선교사 제자들을 만듭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보고 들은 후에 달려가서 부활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선언한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복음은 그 여인들의 말이 “사도들은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 (11절)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명성이나 인상을 보존하는 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그들의 말을 측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그 소식을 전하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세상의 거리를 이렇게 달릴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두려움 없이, 책략과 술수 없이, 단지 모든 사람들을 복음의 기쁨으로 이끌려는 열망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 경험을 나누십시오; 주님의 기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우리가 주님을 가두어 두었던 무덤에서 돌을 굴려 버리십시오. 우리가 그를 봉인했던 무덤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다시 일으킵시다. 우리가 그분을 자주 가두었던 좁은 감방에서 그분을 해방시킵시다. 우리가 평화로운 잠에서 깨어나 그분께서 우리를 방해하고 불편하게 합시다. 그분을 우리의 일상생활로 데려옵시다: 전쟁의 공포로 특징지어진 이 시대에 평화의 몸짓을 통해, 깨진 관계 속에서 화해의 행동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연민의 행동을 통해, 불평등의 상황 가운데 정의의 행동과 거짓의 한가운데에 진실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과 형제애의 활동으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희망의 이름은 예수님입니다. 그는 우리 죄의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가장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깊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의 얽힌 길을 헤쳐나가시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시고, 죽음의 어두운 심연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셨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절을 축하합시다! 그분은 살아있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걸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해방시키십니다. 그분 덕분에 악은 힘을 빼앗겼습니다; 실패는 더 이상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한 통로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떤 밤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밤에도, 그 어둠 속에서도, 샛별은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이 어둠 속에서, 시장님과 친애하는 국회의원 여러분, 전쟁과 잔혹함의 짙은 어두움 속에서 우리 모두는 오늘 밤 당신과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고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친교와 우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용기!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축하하는 가장 위대한 것을 여러분께 말합니다: Christòs voskrés! (역자 : Христос воскрес! 우크라이나어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탈리아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2/documents/20220416-omelia-veglia-pasquale.html 영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2/documents/20220416-omelia-veglia-pasquale.html      
용범 디에고 수사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 30) 수사님 & 형제님, 늦었지만, 축성생활의 날을 축하드리며,  교황님의 주님 봉헌 축일 미사 강론을 올립니다.  ※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직역, 의역, 오역 3종 선물세트를 함께 드립니다. ^^;;   (피드백 열렬히 환영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언제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기쁘고, 복되고, 거룩한 축성 생활을 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    주님 봉헌 축일 제26회 세계 축성 생활의 날   봉헌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 회원들과 함께하는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성 베드로 성당, 2022년 2월 2일   두 장로인 시메온과 한나는 성전에서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 : 메시아의 오심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시메온이 하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는 성령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의 구원을 보고 마침내 그를 자신의 품에 안습니다 (루카 2,26-28 참조). 우리는 이 세 가지 행동을 단순하게 고려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특히 축성 생활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첫째,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할까요?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27절)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시메온의 마음을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합니다. 성령은 마음속에 기대를 살아있게 합니다 : 그는 그에게 성전에 가도록 재촉하고 비록 가련한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메시아를 그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 그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위대한 일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힘의 과시에서가 아닌 비천하고 연약함에서 분별할 수 있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비천함과 연약함, 그러나 또한 극적인 것 : 하느님의 힘을 발견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라는 말은 영성 신학에서 “영적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인식하는 영혼의 움직임이며,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위해 시험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내적인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또한 누가 우리를 가장 많이 움직이게 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령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영입니까? 이 질문은 모든 사람 특히 축성된 사람들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이 우리로 하여금 아기의 비천함과 연약함에서 하느님을 보도록 인도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결과, 목표 그리고 성공의 측면에서만 우리의 축성을 보는 위험이 있습니다 : 우리는 영향력, 가시성, 숫자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반면에 영은 이것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매일의 충실함을 기르고,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길 바라십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보여준 충실성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가고, 시간이 흘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일 지켜보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낙심이나 불평 없이 기대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충실함 안에서 인내하며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불을 붙이신 희망의 불꽃을 키웁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시대를 움직이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랑이 우리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합니까? 그것은 성령입니까? 아니면 순간의 열정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때로는 선행의 겉모습 뒤에 나르시시즘의 병폐나 눈에 띄고 싶은 욕구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종교 공동체들은 성령께 열정적으로 열려있기 보다는 기계적인 되풀이 - 그저 바쁘게 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 - 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축성 생활의 쇄신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거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내적 동기를 살펴보고 영적 움직임을 분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는가? 성령에게 이끌린 시메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0절). 이것은 믿음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 그것은 눈을 뜨게하고, 시선을 바꾸고, 관점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많은 만남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자비로운 시선에서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셔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주시는 데서 믿음이 탄생합니다. 우리 자신, 다른 이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방법입니다. 이 시선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입니다. 순진한 시선은 현실을 도피하고 문제들을 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지적인 시선은 “안을 들여다보고”, “저 너머”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의 그 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분별하기 위한 시선입니다.   연로한 시메온의 눈은 세월이 흘러 흐려졌을지라도 주님을 봅니다. 그들은 구원을 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각자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 우리의 눈은 무엇을 보는가? 우리의 축성 생활에 대한 비전은 어떻습니까? 세상은 자주 그것을 “낭비”로 봅니다 : “훌륭한 젊은이가 수사나 수녀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아깝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못생겼다면…그렇지만 아깝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은 아마도 그것을 과거의 유물, 쓸모없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 남녀 신앙인들은 무엇을 봅니까?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갈망하며 단지 내면으로만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안과 밖을 모두 바라보는 선견지명이 있는 믿음의 시선이 될 수 있습니까? 바라보는 것의 지혜를 가지고 - 이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 그것들을 잘 보고, 원근법으로 보고, 현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저는 눈이 밝고,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이런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이 든 축성된 남녀들을 볼 때 크게 교화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들의 눈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근래에 우리는 연로한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보고, 이야기하고, 질문하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좋은 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가 축성 생활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키우도록 청하는 표징을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할 필요가 있지만, 성령의 빛과 그의 움직임에 유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징을 못 본척하고 평소처럼 늘 하던 대로 똑같은 오래된 일을 하고, 관성을 통해 변화의 두려움에 마비된 채로 과거의 형태에 표류하여 되돌아갑니다. 저는 이것을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 오늘날 안전을 위해, 두려움 때문에, 창립자의 카리스마 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되돌아가려는 유혹…그것은 유혹입니다. 되돌아가서 “전통”을 엄격하게 지키고 싶은 유혹. 이것을 머릿속에 새겨둡시다 : 엄격함은 도착이며 모든 형태의 엄격함 아래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시메온도 한나도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웠고, 축하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 시메온은 주님을 찬양하고 용기를 내어 아기의 어머니에게 예언합니다. 한나는 좋은 노파처럼 계속 말했습니다 : “그들을 봐요!” , “이것 좀 봐요!”. 그녀는 기쁨으로 말하였고, 그녀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과거의 관성도 없고, 엄격함도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뜹시다 : 영이 우리의 위기와 우리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위기 속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역자 : 또는 신부님), 거기에는 사명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새롭게 하기 위해 우리의 힘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용기와 두려움 없이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우리는 시메온과 한나를 보아야 합니다 : 그들은 나이가 많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애도하며 나날을 보내지 않고, 대신에 그들 앞에 펼쳐진 미래를 끌어안았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어제를 되돌아보거나 오지 않을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낭비하지 맙시다; 그 대신에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서 흠숭하며, 선을 볼 수 있는 눈과 하느님의 길을 분별하는 눈을 청합시다. 우리가 그분께 청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실 것입니다. 기쁨과 용기와 두려움 없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품에 안고 있습니까? 시메온은 예수님을 그의 팔로 안았습니다 (28절 참조). 이것은 복음에서 의미심장하고, 유일무이하며,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안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은 우리의 팔에 안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방향을 잃거나, 수천 가지 다른 일들에 휘말리며,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뛰어드는 위험을 무릅쓰지만, 모든 것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껴안습니다.   시메온이 예수님을 품에 안았을 때, 그는 축복과 찬미와 놀라움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축성 생활을 한 우리는 놀랄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까? 우리에게 아직 이 능력이 있습니까? 이것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만일 그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메온과 한나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또는 그녀로 하여금 성전과 같이 감춰졌던 우리 안에 하느님이 행하시는 놀라움 앞에서 놀라움의 은총을 구합시다. 축성된 남녀가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말이 부족하고, 기쁨이 부족하고, 열정이 부족하고, 형제의 삶이 그저 따분하고, 놀라움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누군가나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정한 이유는 우리의 팔이 더 이상 예수님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성된 남자나 여자의 팔이 예수님을 껴안지 않을 때, 그들은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공백을 껴안지만 그것은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팔에 예수님을 안으십시오 : 이것이 표징이요, 여정이며, 쇄신을 위한 비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팔에 안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은 비통함의 먹이가 됩니다. 비통한 신앙인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에 대해 불평 합니다 : 선배, 그들의 형제, 자매들, 공동체, 음식…그들은 불평할 무언가를 위해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흠숭하고 품으며, 선을 볼 줄 아는 눈과 하느님의 길을 분별하는 눈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 팔을 벌려 그리스도를 포용한다면,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을 신뢰와 겸손으로 포용할 것입니다. 그러면 갈등이 번지지 않고, 의견 차이가 갈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품위를 손상시키려는 유혹이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두 팔을 벌립시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오늘 우리의 축성을 기쁘게 새롭게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무엇을 “움직이는지” 우리 스스로 물어보고, 어떤 새로운 비전을 키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우리 팔에 품읍시다. 때때로 우리가 피로와 권태를 경험할지라도 - 이 또한 일어납니다 - 우리는 시메온과 한나가 한 것처럼 합시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기다렸고, 그분과의 만남의 기쁨을 스스로 빼앗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만남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이것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다시 중심에 두고, 기쁨으로 전진합시다. 아멘.   이탈리아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2/documents/20220202_omelia-vitaconsacrata.html 영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2/documents/20220202_omelia-vitaconsacrata.html           
용범 디에고 수사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영어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어와 내용이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오역이 제~법 있습니다. 미흡하지만,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다가오는 2022년도 주님과 함께 으쌰으쌰 걸어보아요! ^^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밤)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성베드로 성당, 2021년 12월 24일.      어둠 속에서 빛이 빛났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영광이 목동들 주위를 비추고, 마침내 수세기동안 기다려 온 메시지를 들려주었습니다 :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루카 2,11). 천사는 계속해서 놀라운 어떤 말을 합니다. 그는 목동들에게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2절). 그것은 표징입니다. : 한 아기, 구유의 엄청난 가난에 누워있는 아기. 밝은 빛이나 천사의 합창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한 아기.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이사 9,5) 다른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이 대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인구조사를 명령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시작되는 예수님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그것은 로마 초대 황제의 모든 위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그것은 우리를 베들레헴으로 데려가고, 그곳에는 전혀 위엄이 없습니다 : 단지 포대기에 쌓인 가난한 아기와 목동들이 서있을 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이 비천하게 계신 곳입니다.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느님은 위엄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셨고, 자기 자신을 비천하게 낮추셨습니다. 비천함은 그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 마음을 울리고, 우리를 구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신 길입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구유 앞에 서서 모든 예쁜 조명들과 장식들 너머에 있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묵상을 합니다. 우리는 아기를 묵상합니다. 그의 비천함 속에 하느님이 온전히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아기 예수여, 당신은 하느님이시고, 아기가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에 놀라도록 합시다. 세상을 품으신 분은 다른 이의 품에 안길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을 만드신 분을 따듯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화된 온유함은 애지중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한한 사랑에는 부드럽게 뛰는 작은 심장이 있습니다. 영원한 말씀은 말을 못하는 아기, “젖먹이”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는 집이 없으십니다. 오늘, 모든 것이 뒤집혀야합니다 : 하느님은 비천함 속에서 세상에 오십니다. 그의 위엄은 작은 것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 우리가 하느님의 일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성탄의 도전입니다 :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남자와 여자는 이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눈에서 자기 자신을 비천하게 하는 반면에 우리는 아마도 그의 이름으로 세상의 위엄을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낮추려고 하지만 우리는 위대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는 목동들을 찾으시고, 우리는 보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여 지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태어나셨고,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냅니다. 하느님은 힘과 권능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는 온유한 사랑과 내면의 비천함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에 예수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 비천함의 은총. “주님, 저희에게 비천함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비천함이 진정한 위대함에 이르는 길임을 저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비천함을 수용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하느님이 우리 삶의 작은 것들에 들어오시길 원하신다는 걸 믿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 집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매일 하는 일들에 거주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의 가운데 그는 비범한 일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의 말씀은 엄청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작은 것들을 재발견하고 가치 있게 여기라고 당부하십니다. 만약 그분이 그곳에 계신다면,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위엄을 갈망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불평들과 우울한 표정들, 그리고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욕심을 제쳐 놓아야 합니다! 그 어린아이의 비천함과 경탄 : 그것이 메시지입니다.      아직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 삶의 작은 것들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비천함에도 오길 원하십니다 : 힘이 없고, 노쇠하고, 부적절하고, 아마도 “엉터리”라고 느끼는 경험에서 말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베들레헴에서처럼, 밤의 어둠이 당신을 압도하고, 차가운 무관심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거나, 내면의 상처가 “당신은 소중하지 않다; 당신은 가치가 없다; 당신은 결코 원하는대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외친다면, 오늘 밤, 당신이 이런 감정이라면 하느님은 응답하십니다. 그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너의 비천함이 나를 겁먹게 하지 않고, 너의 결점이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위해 작아졌다. 너의 하느님이 되기 위해, 나는 너의 형제가 되었다. 사랑하는 형제여, 사랑하는 자매여,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게서 어느 정도 너의 위대함을 찾아라. 나는 너에게서 가까이 있고, 내가 부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 나를 믿고 너의 마음을 내게 열어라”.      비천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작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 곧 우리 형제와 자매들 중에 가장 작은 자들까지 하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가장 닮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존경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 사랑의 밤에 우리는 오직 하나의 두려움만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우리의 무관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여 그분을 상처 입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반가이 맞아줄 것입니다. 한 시인은 :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디킨슨. 에밀리 엘리자베스, 시, P96-17) 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잃지 맙시다; 이제부터 우리가 예수님을 돌보고, 어려운 이들을 어루만져 주어야합니다. 이는 그분이 자기 자신을 그들 안에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구유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바로 그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음을 봅니다. 목동들이요. 그들은 가장 단순하고 주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발견한 것은 그들이 들판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루카 2,8)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곳에 일하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시간표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양 떼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장소와 방식에 따라 살 수 없었고, 그들이 돌보는 양들의 필요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 그들과 가깝고, 잊혀진 주변 사람들과 가까웠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존엄성이 시험받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을 고귀하게 하기 위해 오셨고, 먼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교육을 받은 중요한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근로자들에게 말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밤 노동의 궁핍함을 품위 있게 채우기 위해 채우러 오십니다. 그는 노동을 통해 남자와 여자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노동 그 자체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인간은 노동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날에 우리는 반복해야 합니다 : 직장에서 더 이상의 죽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헌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유를 마지막으로 바라볼 때, 멀리서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여행하는 동방박사들을 언뜻 봅니다. 우리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 주위에 모든 것이 함께 모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목동들뿐만 아니라 학식 있는 이들, 부자들 그리고 동방박사들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부자와 가난한 이, 동방박사처럼 경배하는 이, 그리고 목동들처럼 일하는 이들이 한데 모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이 중심에 계실 때 통일이 됩니다 :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신앙의 본질, 우리의 첫사랑, 경배와 자선에게로. 순례의 길을 가는 동방박사들을 바라보며, 공동합의적 교회, 여정중인 교회로써, 하느님이 사람 안에 계시고,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베들레헴으로 우리는 가야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첫 번째 자리에 앉으셔서 경배를 받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그분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은 모든 분류와 분류를 넘어 형제애로 합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경배하고, 가난하고, 형제애적인 교회가 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가정, 목동들, 동방박사,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여주는 성탄의 복음에 순명하여 우리는 그곳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인생 자체가 순례이기 때문에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 빛이 켜졌으니 우리 스스로 깨어나야 합니다. 부드러운 빛, 우리가 비천함 속에서 사랑받는 아들과 딸, 빛의 자녀(1테살 5,5 참조.)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함께 기뻐합시다. 오늘 밤부터 우리 세상에 밝게 비추시는 예수님의 빛, 이 빛을 아무도 끄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1/documents/20211224-omelia-natale.html   영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documents/20211224-omelia-natale.html  
용범 디에고 수사
알바트로스의 경이로운 일대기와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조화롭게 풀어낸 다큐멘터리입니다. 알바트로스 제작자와 팀원들은 이 영상이 더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기를 원했습니다. 덕분에 무료로 사람들에게 배포되고 있습니다. 한글로 번역하여 자막을 만든 이도 자막이 공유되기를 바랐기에 함께 공유합니다.   ALBATROSSTHEFILM.com 영상 : 시청 및 다운로드 한글 자막 : 다운로드 공공 예술 작품으로서의 알바트로스 ALBATROSS를 세상에 출시할 때가 다가오면서 나는 그것을 상용 제품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사랑하는 새들을 플라스틱으로 채웠던 동일한 파괴적인 대량 소비 기계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드웨이의 경험은 인생을 바꾸는 선물로 내게 다가왔고, 가능한 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전달되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또한 지금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크든 작든, 삶을 대신하여 근본적으로 창의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8년 동안의 사랑의 노동을 세상에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염두에 두고 ALBATROSS는 무료 공개 작품으로 제공됩니다. 2018년 지구의 날(4월 22일)부터 ALBATROSS는 가족, 친구, 커뮤니티, 조직, 교회 등을 위한 무료 상영을 전 세계의 개인이 주최할 수 있도록 제공됩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미 이 집단에 가입하기 위해 등록하고 있습니다. 의식을 높이는 경험. 우리의 "주최 상영" 캠페인은 Parley for the Oceans가 주최하는 공식 세계 해양의 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ALBATROSS가 UN에서 상영되는 2018년 세계 해양의 날(6월 8일)에 절정에 달합니다. 그날 ALBATROSS는 영구적으로 무료로 제공됩니다. 원문보기   후원 : donation ALBATROSS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물-경제적 제안으로 세상에 주어집니다. 주요 전파 방법은 입소문, 소셜 미디어 및 주최 상영입니다. 네트워크를 통해 ALBATROSS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공유하여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증폭할 수 있습니다. 다른 국가에 있는 친구에게 전송하여 청중이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상영회를 주최하는 것은 친구나 가족을 위한 작은 상영일지라도 연결되고 보람이 있습니다. 커뮤니티 포럼을 확인하고 재정적 기여도 고려하십시오. 적은 금액이라도 차이를 만들 수 있으며, 들어오는 모든 자금은 ALBATROSS가 세계로 더 멀리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사랑하는 새들의 변화된 이야기를 모든 곳에서 마음을 일깨우는 데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우리 공동의 집에 함께 사는 야생 동물들에게 들이 닥친 플라스틱 쓰레기의 위험을 함께 이해하고 우리의 무분별한 소비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반으로 한 탄소시계(Carbon Clock) https://www.mcc-berlin.net/en/research/co2-budget.html   ‘지구온난화’라는 단어가 너무나 익숙합니다.  이상기후에 관한 뉴스를 접하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상기후의 원인으로 ‘지구온난화’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징조가 있고, 임계점을 넘어서면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지금의 이상기후는 앞으로 겪게 될 환경위기의 작은 징조일 수 있습니다.  독일에 MCC 연구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2012년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인류의 건강한 삶을 위한 경제 및 사회과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합니다.  이곳에는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반으로 한 탄소시계(Carbon Clock)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MCC 연구소) 탄소시계는 2가지 시나리오를 보여줍니다.  인류가 기온 관측을 시작한 1880년을 기준으로,  지구의 온도가 1.5도 상승하는 시점과 2.0도 상승하는 시점입니다.    1. 1.5도 상승까지 남은 시간 - 6년 10개월 (약 2028년 1월 시점) - 전 세계 옥수수 수확량 연간 6% 감소  - 전 세계 어획량 연간 150만t 감소 - 곤충 6%, 식물 8%와 척추동물 4%가 기후에 적합한 영역을 절반 이상 상실 - 해양 가열, 산성화와 더 강한 폭풍으로 산호초 70∼90% 감소 - 여름철 북극 해빙은 1세기에 한 번씩 완전히 사라짐 [출처] [환경] 지구온난화 1.5도 상승까지 남은 시간 - 6년 10개월 |작성자 큰구름
성바오로수도회
+ Resurrexit sicut dixit, alleluia!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부활을 축하드리며, 2021년 파스카 성야 교황님 강론을 올립니다. ^^;; 의역과 오역이 많으오니...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라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모님의 보호하심과 전구를 청하며   파스카 성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성 베드로 성당 - 성좌의 제대 성토요일, 2021년 4월 3일      여인들은 그들이 기름을 바를 시신(예수님)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신 그들은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예수님)을 애도하러 갔지만, 대신에 생명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복음은 그 여인들이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마르 16:8)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무섭고,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고 말합니다. 놀라움: 이 경우는 기쁨과 섞여 있는 두려움이 함께 있으며, 무덤의 큰 돌이 굴려져 있고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그 안에 있는 청년을 보고 그들의 마음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것은 경이로운 것입니다 :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6절). 그리고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7절). 우리 또한 이 부활절 메세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 갈릴래아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갈릴래아로 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할까요?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에게 그것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그들을 부르시고 그분을 따르라고 하시고 그들을 찾으신 곳으로 돌아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은 첫 만남의 장소이자 첫사랑의 장소입니다. 그 순간으로부터, 그들은 그물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그분이 행한 경이로운 일을 목격하며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분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온전히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주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십자가로부터 도망쳐 그분을 혼자 있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그들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으로 내세우십니다. 즉 그들보다 먼저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부르고 그들이 그분을 전혀 지치지 않고 따르게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분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시작한 곳부터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하자구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가 다시 시작하기를 원한다”. 이 갈릴래아에서 우리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움을 배우고, 우리가 패배한 길에서 새로운 길을 따라가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패배한 길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십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릴래아에서 그렇게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첫 번째 부활절 메시지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의 새로운 삶을 일깨워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잔해로부터 – 우리들 각자 마음의 잔해로부터 – 하느님은 예술 작품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파괴된 잔재로부터 하느님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고통, 황폐와 죽음의 십자가와 다시 떠오르는 삶의 영광, 변화하는 역사, 다시 태어나는 희망에서 우리 보다 앞서 나가시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으십니다. 전세계적인 유행병의 어두운 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결코 희망을 잃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두 번째로, 갈릴래아로 가는 것은 새로운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덤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것을 기억하고 지금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려고 갑니다. 그들은 슬픔에 빠지러 갑니다. 한때 아름다웠던 무언가의 기억이 될 수 있는 일종의 믿음이며, 지금 단순히 상기될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 우리를 포함한 - 예수님이 과거의 누군가로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젊은 시절의 친구인 것처럼 어린 시절 교회의 교리에 참석했을 때 일어났던 사건처럼 “기억의 믿음”을 경험합니다. 습관으로 만들어진 믿음, 과거의 것들, 사랑스러운 어린시절의 기억들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감동시키지 않고 도전하게 하지 않는 믿음 입니다. 갈릴래아로 가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믿음으로 살아있기 위해서 길로 돌아가는 것을 깨닫는 걸 의미합니다. 매일 여정의 시작과 첫 만남의 놀라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방식에 놀라게 내버려두는 사람의 겸손함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느님의 놀라우심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이 우리를 놀라게 하실까봐 걱정합니다. 오늘날 주님은 우리 자신이 놀라게 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갈릴래아로 가서 어린시절의 기억 사이에서 하느님을 둘 수 없지만 살아계시고, 언제나 놀라게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 부활절 소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과거의 기억의 앨범이 아니며, 예수님은 구시대적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분이 겪고 있는 시련에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희망과 꿈에서 여러분과 매일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적어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새로운 문을 열어주고, 과거에 대한 향수나 현재에 대한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촉구하십니다. 비록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끼더라도,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움에 놀라도록 여러분 자신을 여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여러분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갈릴래아로 가는 것은 주변 지역으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릴래아는 전초기지 였습니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순결 의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서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매일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취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낙담하거나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얼굴과 존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눈에는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이라도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자고 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일상생활의 진정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여행하는 거리, 우리의 도시들 구석 구석을 가라고 요청하십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우리 주변 사람들, 우리 시대에 함께 하는 사람들, 우리 가정, 일, 어려움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삶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우리는 형제자매들의 얼굴에서 꿈꾸는 사람들의 열정과 낙담한 사람들의 체념, 기뻐하는 사람들의 미소와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물에서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부활하신 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작게 드러나고, 그분의 아름다움이 소박하고 가난한 데에게서 어떻게 빛을 내는지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부활절 메시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제한 없이 사랑하시고,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꼐십니다. 우리 세상의 중심부에 모습을 드러내신 그분은 우리가 장벽을 극복하고, 편견을 없애고, 일상생활이 은총을 재발견하기 위해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 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갈릴래아의 일상생활에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모든 패배와 악과 폭력과 모든 고통과 죽음 너머에 부활하신 분이 역사를 살아가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이 밤에 어둠(악)의 시간에 아직 날이 밝지 않거나, 빛이 희미하거나,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경험을 했다면 가서 부활절의 놀라운 메시지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두려워 마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분은 너를 갈릴래아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여러분의 기대는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고, 여러분의 눈물은 마를 것이고, 여러분의 두려움은 희망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여러분을 앞서 가시고, 항상 여러분 보다 앞서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삶은 항상 새롭게 시작됩니다. 번역 : 유 디에고 수사.   출처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1/documents/papa-francesco_20210403_omelia-vegliapasquale.html (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documents/papa-francesco_20210403_omelia-vegliapasquale.html (영어)    
용범 디에고 수사